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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

한국의 고대 천문대 창경궁 관천대와 간의대

by 띠아모 2022. 9. 5.

창경궁 관천대는 서울에 있는 궁궐인 창경궁에 있는 관천대로,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는 천문기구인 소간의를 놓았던 돌로 만든 대이다. 1985년 8월 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851호로 지정되었다. 이런 관천대로는 이 유물과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관상감 자리인 옛 휘문 중고등학교 자리인 지금 현대건설 주식회사 건물 대지 안에 있는 관상감 관천대 두 개가 있을 뿐이다. 창경궁의 관천대는 조선 후기 숙종 때 평지에 만들어진 것이며, 개성의 첨성대가 평지에 위치하는 것과 입지가 유사하다. 중심 전각들을 축으로 살펴보면 그 반대편에 관측하던 언덕이 마주하고 있다. 그 언덕에서는 창경궁 전체를 내려다볼 수도 있으며, 창경궁의 동궁이 그 언덕 아래에 궁의 제일 안쪽으로 위치한다. 이것은 숙종 이전에는 관측 업무가 창경궁에서 상당히 큰 비중으로 다루어졌음을 잘 말해준다.
보물 제1740호인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광화방 소재 관상감이 있던 자리에 설치된 관천대인 관상감 관천대는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관상감에 관천대는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서 장영실과 세종이 얘기를 나누기도 한 곳이다. 
서운 관지에 관상감과 관천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본 감이 하나는 경복궁 영추문 안에 있고, 하나는 북부 광화장에 있었는데 거기에 관천대가 있었다. 중간에 전쟁을 만나 창경궁의 금호문 밖과 경희궁의 게양 문 밖에 고쳐 세웠는데 다 관천대가 있었다. 흔히 첨성대라 부른다. 숙종 1688년 무진년에 영감서 남구만이 몸소 터를 살펴 관가를 처음 세우니 이것이 금호문 밖의 본 감이다. 하늘을 살펴 숙직하는 제도가 한때 성하게 갖추어졌고... 대의 설치 규모는 대략 같고, 청사 동서 쪽의 집은 작다. 이때 김창집이 본 감을 감독했다. 세월이 오래됨에 무너져 황폐하니 이에 임금께서 신미년에 비로소 건물을 세워 측후하는 곳을 갖추었다. 무인년에 또 문과 곁채를 세우고 관천대를 호조에서 수리하였다. 동쪽과 서쪽 방과 청사가 7칸 반이고 이 층이 3칸이며 대문 좌우의 행랑이 각각 1칸이고, 해시계와 측우대가 있다. 관천대는 청사 남쪽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고 돌난간을 둘러 평방석을 올려놓았는데, 천체를 관측할 때는 그 위에 소 간의를 설치하였으므로, 소간 의대라고도 한다. 
창경궁 관천대는 화강암 석대 위에 돌난간이 둘려 있고, 돌계단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대의 한 가운데에는 다시 돌대가 놓여 있어, 그 위에 소간의를 설치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현재 소간의는 없다. 관천대 위에 설치한 소간의는 천체들의 자리를 관측하는 천문 관측기구인 간의를 작고 편리하게 만든 것으로, 적 도환·백각환·사유환의 3개의 환으로 이루어졌다. 
간의대는 조선시대의 천문대로 천체관측 기구인 조선 세종 때 제작된 실외용 천문 관측기구인 간의를 올려놓았다고 하여 간의대라고 한다. 
조선은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왕립 중앙 천문기상대로서 고려시대부터 존재하였던 기구로 천문학, 지리학, 역수, 기상의 상태를 알기 위하여 천문의 이동이나 천기의 변화를 관측한 측후, 물로 시각을 측정하는 장치인 각루 등의 업무를 맡아보던 관청인 서운관이 있었으며, 그 관측 시설로 간의대를 설립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서운관이 경복궁과 북부 광화장의 두 곳에 있었다. 대간 의대에는 천체 관측 기구인 혼천의, 혼상, 규표와 방위 지정 표인 정방 안 등이 부설되었고, 대의 서쪽에는 동표의 높이 40척(약 8m 24cm)의 거대한 규표가 세워졌다. 청석으로 된 규면에는 장, 촌, 분의 눈금을 새겨 일 중에서의 동표의 그림자 길이를 측정하여 24절기를 확정하였다. 1432년 세종 14년부터 만들기 시작한 대규모의 천문 의상들을 설치하기 위해서 1433년 세종 15년에는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높이 31척(약 6.3m), 길이 47척(약 9.7m), 깊이 32척(약 6.6m)의 석조 노대를 쌓고 돌난간을 둘러 간의대를 설립하였는데, 대간의를 설치하여 시험관 측을 거쳐 1434년 세종 16년에 준공되었다.
이 천문대는 원의 곽수경이 세운 거대한 관성 대 이후 동양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갖춘 것이었고, 1438년 세종 20년 봄부터는 매일 밤 5명씩의 서운관 관리가 입직하여 계속된 관측을 하게 되었다. 간의대는 세종대에 창설된 이후 여러 번 개수되면서 조선의 왕립 중앙천문대로서 동양 최대 규모와 최고 수준의 시설을 갖추었고 그것은 외국 사신들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다.
이렇게 한국 천문학 사상 가장 훌륭한 시설을 자랑하던 대간의대는 임진왜란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된 채 다시는 복구되지 못하고 말았다.
조선 시대에는 천문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였으며, 세종 이후로 다양한 천문과 기상관측기구가 개발되었다. 조선 초기부터 석각본, 목판본, 필사본 등으로 제작, 보급된 한국의 전천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 지도와 조선 세종 때 제작된 실외용 천문 관측기구인 간의, 혼천의, 1434년 조선 세종대왕 16년 이후로 제작, 사용된 해시계로, 과학, 역사,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5년 8월 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845호로 지정된 앙부일구, 풍향과 풍속을 관측하기 위해 사용된 깃발의 깃대 끝에는 좁고 긴 깃발을 매어 날리는 방향으로 풍향을 재고 나부끼는 정도로 바람의 세기를 관측하는 풍기대, 강우량 분포를 측정하던 기구로써, 세계 최초의 강우량을 재는 기계는 아니지만 조선 세종 때 처음 만들어 전국에 보급, 시행하였으며 조선시대 절반에 걸쳐 활용되고, 현존하는 유일한 측우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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